2022년 5월 28일 토요일

부처님 중의 부처님이신 석가모니불을 칭명해야

  부처님 중의 부처님이신 석가모니불을 칭명해야

 

 

 

 

우리나라의 경우 칭명염불이라 하면 보통 정토종에서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세간 소원을 이루기 위해 관세음보살을 찾고, 영가 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지장보살 칭명염불을 하며, 특별히 병고소멸을 위해 약사여래불을 부르기도 하는 정도다.

 

그러나 부처님 중의 부처님이신 석가모니불을 찾지 않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불교가 얼마나 부처님에 대해 무지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부처님은 최초불이시며, 부처님 중의 부처님이시며,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시며 아버지시다.  상상할 수 없는 위신력과 능력을 가지신 우주의 법왕이시다.  이런 부처님을 제쳐두고 칭명염불을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

지 않는 대목이다.

 

영산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 칭명염불을 공식수행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 칭명염불은 염불에 들어가기 전에 해당 부처님 경전과 다라니를 독송한다는 점에서 정토종과 트게 구별이 된다.  기왕 아미타불 칭명염불을 하고 있다면 경전과다라니를 함께 독송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 우주적 진리의 신불교

영산불교의 법세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2권 축약판)






경전을 읽고 다라니를 하고 염불을 해야 됩니다

 

 

경전을 읽고 다라니를 하고 염불을 해야 됩니다경전 읽고 다라니하고 염불해야 돼요걸 칭명염불이라 그래침영염불도 여러가지가 종류가 있지만 우리 현지궁 현지사에서는 아미타불을 권하지 않고 석가모니불을 권합니다.

 

석가모니불을 권하는 것은 부처님 중에서 가장 먼저 불과를 증했고 그래서 삼계의 법왕이고 남섬부주 교주시고 하기 때문에 우리 석가모니불을 염하도록 한 거에요이것은 경전적으로도 법화경에 확실이 근거하고 법화 8품에서 주장하고 있고 그래서 이 현지사의 칭명염불법은 현지사에 종지는 저 염불종 정토종이라고도 하지요 연종이라고도 하지요 연종 연종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있습니다보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이렇게 살으십시요 한데로 여러분이 살면은 여러분이 살면은 여러분은 지금 인제 속가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윤회를 벗어날 수가 있어요대로만 살면은윤회를 전부 벗어날 수가 있어죽을 때 똥오줌 안 누고 편히 잠자듯 갑니다반드시 그렇게 됩니다금강경읽고 칭명염불하면 그렇게 된다고금강경에 다가 부처님의 다라니를 또 하지 또 석가모니불을 그렇게 염하지하루에 삼십분정도씩은 최소한 한 시간 정도만 할애해주면 좋겠습니다그 이상하라고 않습니다한 시간 정도만.

 

그러면은 왜 석가모니불을 또 칭명을 하라 하냐면요 업장을 지은 업을 또 탐진의 뿌리를 요걸 묶어서 업장이라고 합니다업장을 소멸해주는 분이 부처님이 올시다그래서 여러분이 현지사에 와서 또 집에서 정말 공부답게 한 시간 정도씩 하고 발원하고 죽을 때까지 그러면 여러분은요 상당한 업장이 소멸이 될 겁니다그래서 칭명염불을 권합니다.

 

공부가 많이 되면요 이 끄달림 집착 머뭄이 없어집니다요것은 증거입니다 인제탐욕심이 적어지구요 욕심 때문에 끄달리고 집착하고 머무는데 욕심이 적어지기 때문에 왜 부처님께서 화신부처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업장을 자꾸 씻어주신단 말이야씻어 주어업장이 씻어지게 되면 아까 업장은 지은 죄 그리고 탐진 그리고 빚 빚도 되요 빚 전생에 지은 빚도 요 업장을 씻어주시기 때문에 공부를 잘한 사람은 끄달림 집착 머뭄이 점점 없어져간다 그거요.

 

이정도 되면 이분은 세상 사람들이 죽으면은 거의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집니다무주고혼 되고요그런데 이렇게만 살면 여러분은 절대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그리고 높은 하늘에 나고 아니면 윤회를 절대 벗어납니다그래서 스님이 칭명염불을 권합니다.

 

칭명염불을 할 때 마실 가는 놈이 금강반야바라밀 금강반야바라밀 요렇게 외우도록 해서 마실 못 가도록 하라고 했죠쪼금 그것이 다 되면은요 석굴암 불상 여그 미간에서 빛이 나가는 것을 보십시오 관해 보십시오이걸 미간 백호상 관 그럽니다미간 백호상 관 그럽니다여기가 백호라고 하면 털이 났다고 하는데 거기서 나간다고 하는데 진짜로 그것을 규명을 해보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건 아닙니다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고 이야기는 않습니다여기서 빛이 나갑니다.

 

부처님은요여러 군데서 빛이 나가는데 여기서 빛이 나가는 이 빛이 진리의 빛입니다그래서 여기서 빛이 나가는 것을 관해라금강반야바라밀을 잘하는 수준이면 그리고 입으로는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고 뜻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 금강반야바라밀이 잘되는 사람이라면 인제 여기 석굴암 부처님상 미간에서 여 두 눈썹사이 여기 미간에서 빛이 나가는 걸 관하는데 그 공부가 되는 사람은 부처님이 현신할 수 있습니다여러분 앞에요.

 

인제 삼매에 들어가서요부처님을 뵐 수 있는데 그 부처님은 화신이지만은 32이상 80종호를 갖춘 부처님을 볼 수 있다 그거요여러분이 그 정도 가면은 거기는 아라한 넘어가는 수준이기 때문에 그건 아주 좋습니다 이 공부가요.

 

자 자기 업장을 씻어서 좋고 우리 집에 나쁜 기도 다 뽑아갔으니 좋고 죽을 때 편히 죽으니 좋고 자 삼재팔난을 만나지 않아서 좋고 전쟁이나 질병이 이 세상을 다 뒤덮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삽니다반드시 살게끔 해줍니다계시가 오거든요그래서 좋고자 그래서 칭명염불을 권합니다.

 

 

 출처/2006년 07월 08일 자재만현큰스님 부산현지사 정기법회중 발췌

 

 

 

 

 




 

부처님께 귀의 염불하는 타력불교로 들어와야 합니다

 부처님께 귀의 염불하는 타력불교로 들어와야 합니다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는 자연의 이법입니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 못 살게 될 수 있고, 못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약한 나라가 국력이 신장되어 강한 나라가 되고, 세계 제일의 제국이 몇 백 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강국强國의 대열에서 낙오되고 약소국으로 전락되기도 합니다.

 

‘불교를 신봉하는 동남아국가들이 왜 잘 살지를 못하는가? 기독교 문명권 서구 여러 나라들이 잘 산다, 나보다 더 많이 배우고 잘 난 이들이 그 종교를 따른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고 학식이 풍부하다고 하여,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여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이 적어 자기 분수에 만족할 줄 알고 교활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으면서 정직하고 진실하며 인륜과 도덕을 지키면서 사는 그 사람이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자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할 줄 알고 불쌍한 이웃을 돌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은 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더욱 나아가 정법을 만나 내면의 영혼을 백설같이 정화한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바람직한 인간상입니다.

 

이 몸은 영원하지도 않고 참된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성 소멸합니다. 그래서 본래 비어있습니다. 《금강경》의 일합상一合相의 도리로 보아야 합니다. 일체가 공입니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은 나와 세상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청정한 계율을 잘 지키면서 탐진 삼독심을 정화해 갑니다. 조석으로 이 나라와 세계의 인류 모두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잘 살기를 기도합니다. 부처님의 위대하신 발자취를 가슴에 담고 여러 생을 통해 지은 죄업장의 소멸을 발원하면서 염불로써 생각을 모아갑니다. 깊은 고요로 침잠해 들어갑니다. 선정에 듭니다. 마침내 시간을 초월한 적정으로 빠집니다.

 

흑암의 동굴 속에서 몇날 며칠을 갇혀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이 작열하는 바깥 세상으로 튕겨져 나왔을 때, 내리쬐는 빛 때문에 생각 따위는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견성 경계입니다.

 

칸트Kant, 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 가 존재의 근원인 빛自性의 光明 속에서 3일을 보냈다합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한 적정의 경계였습니다.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희를 가져온 칸트는 비판주의의 웅대한 철학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라는 생각도, 어떤 대상의 흔적도 없습니다. 급기야 우주의 제행諸行을 주재하는 진리, 이법의 본래 모습을 면대합니다. 견성입니다. 도를 통했다는 자리입니다.

 

여기서도 한없이 들어가면 삼매에 듭니다. 우주의 모두를 요달합니다. 중생이 나서 사는 육도의 세계를 봅니다.

 

불교에선 여기를 보살의 법위라 봅니다. 보살이 무량겁동안 반야와 복덕을 지으면 비로소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불신을 얻는 부처님이 됩니다. 이런 자리는 결코 학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실천 수행으로서만 드는 경지입니다.

 

이 수행자는 인생을 압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압니다. 어떤 가르침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10장 중에서




타력은 필요 충분조건

- 여러 마장을 중심으로

 

자력불교로는

21세기의 인류를 향도하기 어렵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싹을 틔우고

그것이 성장하여 많은 알곡을 얻으려면

농부의 손길도 필요하고

적당한 비료, 햇빛, 적당한 비, 바람도 필요합니다.

자력‧타력은 필요 충분조건입니다.

 

 

많은 종교학자들, 불교학자들까지도 불교를 자력불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력이면서 타력입니다. 아니, 불교는 타력불교인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우리 이웃들 모두가 금생에도 잘 살고, 다음 생에도 더 잘 살았으면 합니다. 이러한 소망은 어떤 종교의 가르침보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이루어진다고 확언합니다.


거룩하고 희유하신 부처님께 귀의하고, 참회하면서 바르고 깨끗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론 염불하면서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면 윤회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아라한도 되고, 보살도 될 수 있습니다.

 

인간 자력수행의 한계는 아라한과를 얻는 데까지라고 나는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여러 마장은 부처님의 절대하신 타력에 의지하여야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백만의 대군을 격파하여 이길 수는 있으나 내 마음하나 이기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 육신에 대한 애착이나 마음 속 탐진 삼독, 오욕의 번뇌마를 조복 받으면 모든 외마를 항복받을 수 있고 천하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과의 사움에서 승리자가 되면 어떤 경우를 당해서도 언제나 무고안온하며 평화롭습니다.

 

≪대품반야경≫에서 우주의 진리자요 대성취자이신 부처님께서 “나는 일체一切의 승자勝者요, 일체의 지자智者……”라고 갈파하신 것은 인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요괴번뇌마, 외마들을 제압하신 진정한 승리자로서의 선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나아가 중생의 업장, 업보까지도 단절해 줄 수 있는 거룩하고 희유하신 유일자唯一者요, 절대자絶對者이십니다.

 

여러 가지의 장애_마장魔障

 

자력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내마內魔가 있습니다.

소위 번뇌마 등입니다. 불안, 초조, 공포라는 한계 상황을 자력으로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형수가 자기 이름이 불려지면 “면회요!”하고 호출하는 소리에 벌써 기가 다 빠져 낙지같이 흐느적거리며 나온다고 합니다. 사형수 같은 입장에 있는 이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 불안, 초조 - 살길이 막연한데 부채의 독촉에 시달려 하루하루 짓눌리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고뇌하는 심정, 아무도 몰래 사람을 죽인 자의 미칠 것 같은 죄책감…… 등에서 오는 극복하기 어려운 번뇌마를 어찌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14세기에 창궐한 흑사병페스트은 100여 년을 주기로 18세기까지 중세 유럽의 인구를 1/3까지 치사케 한 전율할만한 공포의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러한 살인적인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에서 며칠을 지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였다 가정합시다. 또 6‧25같은 난리가 터져 수많은 소중한 인명이 날마다 죽어 가는 전쟁통에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때의 불안하고 초조한 공포의 한계 상황에서 우리가 설사 화두타파 등을 통해 선정에 들 정도의 수준이 됐다 하더라도 진정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은 어려운 것입니다.

독사 구렁이가 내 방 안으로 들어와 숨었다 합시다. 한밤중입니다. 나에게 접근해 오는 소리가 납니다. 이 경계를 당해 감히 그 뉘라서 초연할 수 있답니까?


안심입병은 자력에 의한 선정의 힘으로는 온전치 못합니다. 보살의 삼매는 한계상황을 극복합니다. 부처님이 이끄시는 삼매력으로 가능해집니다.

 

둘째, 외마外魔가 있습니다.

1) 고약한 원결 영가들의 빙의 2) 용신, 사신, 이매망량, 정매마精魅魔 3) 천마天魔 등에 의한 빙의는 결코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어느 도인도 이를 떼지 못할 것입니다. 토굴에서 스승 없이 잘 못 공부하면 용신, 이매망량, 천마가 빙의합니다. 용신, 이매망량, 천마들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성과를 이루어가는 수행자를 방해합니다. 빙의합니다. 


빙의된 이들을 떼지 않고 공부한다면 평생을 정진해도 마경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빙의되어 있는 상태의 정신으로는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습니다. 여러 경계로 수행자를 괴롭힙니다. 때로는 묘한 경계를 보여주어 수행자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고, 집착하게 만들어 결국은 정신이 돌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죽으면 악도에 떨어집니다.


천마나 귀신주로 사이비 도인의 영가이 빙의돼 있는 무당이나 신기 있는 이들이 가끔 불 보살과 대화를 한다고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마나 귀신의 말을 듣고 불 보살과 대화하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점 명심하기 바랍니다.

 

또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변화술에 능한 천마하늘마가 공부하는 수도인에게 불 보살의 모습으로 둔갑해서 화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을 절대계에 계시는 붓다로 보면 안 됩니다.


붓다의 화신에서 볼 수 있는 자비·선정·지혜·지계·인욕의 모습을 천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화신과는 마치 왕과 거지만큼 천지 차이입니다. 그들에겐 무량광은커녕 청정한 빛조차 흉내 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엔 욕심과 살기가 있습니다. 해탈한 성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깨끗하고 청정한 기운을 느낄 수 없습니다. 붓다의 화신은 몸 주변에서 맑고 깨끗한 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마의 몸 주위의 빛은 탁할 뿐입니다.

 

셋째, 다겁생을 살아오면서 지은 크고 작은 악업으로 앞으로 미래세에 받을 과보의 업장 그리고 악, 불과를 이룬 성자의 경지에서 소멸된다는 악·습기習氣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단절·정리해 주지 않는 이상 10생, 100생을 수행한들 영적인 성장을 기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지적 사항은 이성異性에 대한 강한 욕구, 성욕과 색마色魔입니다. 20~40대까지의 젊은이들은 성적 잠재욕구 때문에 대부분 꿈에 몽정·몽설을 합니다. 특히 출가해서 부처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수행자로서 자위행위나 동성연애는 사음죄로 본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큰 번뇌가 되어 성과를 얻기 어려운 결정적 장애가 됩니다. 그러나 천에 한 사람 불법 공부 잘해서 스스로 깊은 선정의 힘을 얻는 이라면 강한 이성에 대한 욕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수행자에게 불행하게도 색마라는 외마가 붙게 되면 설사 견성한 공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천 길 나락에 떨어지게 됩니다. 외마는 번뇌마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점 명심해야 합니다.


다행히 부처님 회상을 만나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색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주기적으로 약사여래부처님께서 수행자의 정수精髓를 뽑아주시기 때문에 정법을 수행하는데 장애가 없게 됩니다. 


이 점 역시 타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외 여러 가지 진리수행자들의 앞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마장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자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들이 중첩해 있습니다.

 

다시 강조해둡니다. 자력수행의 한계는 깨달음까지입니다. 견성까지입니다. 이 정도 선정의 힘으로는 지정한 안심입명도 어렵고, 천마 등 장애를 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색이성에 대한 경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업장, 악·습기習氣의 소멸은 더욱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 철학사상에 있어서 깊은 경지에 든 분들의 신념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선정력 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타력,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에 의하여 드는 삼매보살삼매 정도가 돼야 번뇌심, 탐욕심, 중생심 모두가 비로소 녹습니다. 업장까지 녹습니다. 죽을 때 나쁜 병 얻어 똥오줌 누고 죽는 일도 없습니다.

 

도고마성道高魔盛

 

과거 생에 선근이 있는 불자 여러분!

위와 같은 여러 장애들 때문에 구도자 중 자력으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정도일 뿐입니다. 깨달음도 이렇듯 어려운 데 깨달음 이후의 수행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것은 불 보살의 모습으로 나투어서 자기 권속으로 삼으려는 변화술에 능한 천마들의 방해 魔障를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공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사람이 깨달음을 얻거나 나아가 아라한 되고, 아라한이 보살 되고, 보살이 붓다 되고자 사바 세상에 몸 받아 올 때 마장은 위계가 높아질수록 필연적으로 무섭게 따라 붙습니다. 도고마성道高魔盛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가끔 이 사바세계에 아라한이 나오고, 정토보살이 나옵니다.

큰 스승이 없이 자력으로 성과를 얻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라한이 될 수행자에겐 때가 되면 성중하늘에서 도반 아라한들이 내려와 외마를 막아주고 공부를 지도해주기 때문입니다.


정법의 길로 끌어주기 우해 그 수행인에게 옵니다. 역시 보살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정토에서 보살들이 보살과를 이룰 시기가 된 수행인에게 와서 도와주고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붓다 될 성자는 부처님이 오셔서 지도하십니다. 그 외에 성자와 불 보살의 가피없이 자력으로 성과를 얻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외마를 막아 줄 큰 스승 없이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자력수행으로는 그 힘든 마장을 도저히 이겨낼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타력을 간과해선 결코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타력불교다!

 

절대계에 불과를 증한 붓다님들이 계신다는 이 복음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자력불교에서 타력불교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을 입어 수행하지 않으면 아라한과도 어렵습니다.


지금까지의 자력불교로는 21세기의 인류를 향도하기 어렵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싹을 틔우고 그것이 성장하여 많은 알곡을 얻으려면 농부의 손길도 필요하고 적당한 비료, 햇빛, 비, 바람도 필요합니다. 자력·타력은 필요 충분조건입니다.

 

출처 : 영산불교 현지궁 현지사

















2022년 5월 17일 화요일

염불선으로의 회귀

 염불선으로의 회귀



돌계집石女의 겁외가劫外歌와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을 말하고 '덕
산德山' 의 30방을 흔들며, 상相에 집착 없는 언어로 공空을 읊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 다된 양 착각하여 오만을 떨었던 지난날을 생
각하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0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상임포교사로서 불법을 포교하기 위해
법상에 앉은 지 채 2~3년도 못 되어 나의 공부禪수행 保任에 회의
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히말라야 초인超人들, 힌두교 성자요기 Ylgi들 및 티베트 밀교의
성자 미라래빠의 수행담을 접하고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
전을 정독하면서 나의 선수행을 비교 점검해본 결과 중대한 발
견을 하게되었습니다.

자성을 깨치는 것은 공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견성見性이 곧
성불成佛' 이라는 산가의 기치旗幟는 분명코 잘못됐으며, 설사 견성
하고 나서 보림을 마친다 하더라도 곧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이 거룩하시고 희유하시며 거의 절
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또한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아라한에 그칠 뿐
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라한으로서는 우주와의 계합이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실존철학의 소위 존대sein 불교의 법성法性, 선禪의 자성自性에 해당가
드러나서 머무는 건 순간일 뿐입니다. 영원히 우주와 계합을 이루
는 성불만이 완벽한 생사해탈을 보장합니다.

소위 견성에 이름으로써 저 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이 우상
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창조주란 없
다!' 고 선언하는 단계가 바로 견성의 경지였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서 이 몸뚱이란 4대지수화풍로 이루어진 옷이나
집과 같은 '가짜 나假我' 라는 것과, 나我라는 것도 오온五蘊-色受想行
識으로 이루어진 인연소생의 가아假我이며 이 세상은 꿈이나 그림
자 또는 이슬과 같은 무상無常한 존재라는 사실도 발견하였습
니다.

분별하고 사량하는 것은 생각일 뿐, 마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
습니다. 이것만 해도 크나큰 깨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지天地 이전, 곧 부처 나기 이전의 적멸寂滅과 우주가 생
기기 이전의 면목을 깨친 이라면 당연히 불교의 연기법만이 진리
라는 것을 사자후할 것입니다.

내가 갑자기 염불선 공부로 용감하게 회귀할 수 있었던 것은 화
엄경 입법계품, 법화경 본문 팔품에서 가르친 대로 무엇보다
도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하는 수행만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토삼부경에서 수행인이 생사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경전 읽고 염불하는 것만이
우리가 보다 잘 살수 있는 오직 하나의 대안代案임을 확실히 보았
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나는 인도의 용수, 마명보살, 중국의 혜원 조사, 진晋의
각현, 담란, 천태지의, 선도, 도작, 영명연수 선사, 한국의 의상, 원
효스님, 서산 선사의 염불선을 크게 주목하면서 우주생명의 실상
實相을 관觀하며 보림을 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모의 젊은 여인을 보고 마음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그 순간 '진여실상이라는 용광로에 무명번뇌나 억겁의 죄장 따
위가 모조리 녹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 주장했던 지난날의 나
의 법문을 스스로 반추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혼자 산행山行을 하던 중에 쉬어갈 만한
곳에서 선정禪定에 들었습니다. 그 선정 중에 문둥병을 심하게 앓
고 있는 남자가 들어와 한 이불 속에서 자고, 밥지어 먹고 지냈을
때, 정말 선정에 들었으면서도 알고보니 천인天人의 선정이었다
중생심의로 돌아가 역겹고 싫은 생각이 줄곧 따라붙고 있었습니다.

한 태백산의 토굴에서 보림하던 어는 여름날, 커다란 구렁이
가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긴장하여 진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본래면목의 실상,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철
견하고 보림한다고 해서 붓다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백생 이전에 수행하실 때에 '가리왕' 이라는 포
악한 악인을 만나 난자당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에게 성내고 원
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아니하셨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
쯤 와 있단 말인고? 결국 인간 능력의 한계라는 명제와 타력他力, 곧
'부처님의 가피' 라는 주제를 두고 차츰 골똘히 생각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깊은 선정에 들어서 그것을 진짜 삼매라고 오해
한 나머지 불 보살을 뵙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친견은 고사하고
지옥 천상세계도 관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윤회를 벗어난 해탈
오계解脫梧界, 곧 도솔정토나 서방극락세계도 끝내 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승禪僧이었음에도, 이 모두가 실제로 존재할 것이
라고 믿었기 때문에 염불선으로 과감히 방향전환하였으나 특히
1970년대 당시의 한국불교에서 선수행이 강고되다 보니, 염불하
는 행자들을 무조건 외도로 몰아 배척하였기 때문에 겉으로 내색
하지 못하고 침묵 속에 정토업淨土業을 쌓았습니다.

또 하나 내가 염불선으로 방향전환을 결심한 데는, 선재동자와
같은 나의 과거 행각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친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처럼 나이와 성별,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고, 이단異端-제2의 예수라 자칭하는 어느 목사님, 부처라
고 떠받드는 어는 재가보살 그리고 전라도 토굴의 어느 도인 등을 이해하고 오
랜 세월 교유함으로써 선禪의 참구參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칭명염불 수행법의 이론적 토대 - 성명쌍수

 칭명염불 수행법의 이론적 토대 - 성명쌍수



수행자가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한 든든한 이론적 토대를 얻기 위해
서는 성명쌍수에 대해서 이해하면 좋다. 흔히 동양 철학과 동양 수행
을 하는 수행자라면 고대 성현들로 부터 전승된 성명쌍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성명쌍수란 성(성품)과 명(생명, 삶)을 함께 공부하라는 것을 학
인에게 당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이란 성품을 말하며, 성품은
마음의 자성을 말한다. 이는 또한 불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목숨, 즉 생명을 말하며, 더 포괄적으로는 삶
이란 점에서 성품을 공부하는 것이 명을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적으
로 영원하게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으로서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내재한 법리와 인연법 그리고 연기사상
을 통찰 및 철견하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성으로서의 자성을 닦는 것이 명으로서의 삶
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성과
명은 함께 닦아야 한다는 성명쌍수를 성현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힌두의 철학 사유에서도 본질 또는 존재를 공부하는 것과 인
연 또는 관계를 공부하는 것 두 가지를 나눈다. 어느 것이 우선이고
어는 것이 차선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을
통해서 내면의 자성 세계로 회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내면과 외면은 뻥 뚫려 내외명철이 된다. 이 내외명철
이 확연히 인식되어 자신의 인식 구조와 존재론적 세계가 하나가 될
때 내외의 벽은 허물어지고 완전히 허공과 같이 충만한 공을 철견
하게 된다.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에서도 쉬바로서의 정적인 성품 의식과 샥티로
서의 동적인 육체 에너지를 이야기한다. 쉬바는 성에 해당하며 샥
티는 명에 해당한다. 성은 관조적 힘이자, 주시적 힘이자, 관찰
자로서의 힘이다. 명은 행위적 힘이자 삶의 영위자로서의 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불가의 팔정도에서 정견, 정사유 등은 쉬바 의식
을 도야하는 바른 길에 해당하며 정업, 정정진 등은 샥티 힘을 도야하
는 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면 명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신 구 의 작용을 의미한다. 성은 체요 명은 용인 것이
다. 21세기 과학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시스템을 비유로 들면 프로그
램들 하나하나의 실체가 바로 성이요 그 프로그램의 행위 또는
작동이 바로 명인 것이다.

체와 용이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성명도 불
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이나 모두가 일차적으로 성을 도야하
는데 있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성을 도야하는 것을 넘어서 부처
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 불신을 얻는데 있다. 큰스님의 법 세계에
서는 성이라는 것은 작은 불씨라면 불신은 태양으로 비유할 수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수승한 공덕의 염불 수행법

 수승한 공덕의 염불 수행법


염불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부처님의 상호, 즉
그 모습을 마음으로 관찰 관상하면서 그 공덕을 기리는 일"
이라고 한다.

염불과 비교해서 다라니가 있는데 다라니의 사전적 의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요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을 뜻한다. 원어명은 dharanl라고 한다. 또한 백과
사전에 의한 설명으로는 "비교적 긴 장구로 되어 있는 주문으로
총지 능지 능차라 번역하며 불법을 마음 속에 간
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다라니들 중에서 좀 더 짧은 다라니인 진언, 즉 만트라에 대
해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 서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신주
주 신주 밀주 밀언 등으로도 번역한다." 본 단원에서는 염불수행과
관련 제반 내용을 집중 조망할 것이다.

먼저, 석가모니불 칭명염불 그 효시, 즉 염불 수행의 원류를 교
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첫째, <<잡아함경>>에 "바사닉왕이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
무여래응정등각' 하니......"라고 되어있으며 둘째, <<중일아함경>>에는
"부처님의 명호, 여래 지진등정각 선서 세간해 ..... 등 여러 가지 명
호를 부르면...., 이 공덕에 의해 두려움이 소멸되고, 신통을 얻고....
죽으면 천상에 난다."라고 되어 있다.

셋째, <<중일아함경>> <억념품>에는 "1. 거닐 때도, 2. 머무를 때도,
3. 앉아 있을 때도, 4. 누워 있을 때도, 5. 항상 어디서나 부처님을 억
념하라."고 되어있으며 넷째, <<대방편보은경>>에는 "석존의 제자 한
사람이 '나무석가모니불'을 부르게 하자, 5백 명의 도둑 신체의 고통이
제거됐다."라고 되어 있다.

다섯째로 <<여환삼마지무량인법문경>>에는 "'나무석가모니불' 부르는
것에 의해, 선근이 증장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과가 있다"고 하
였다. 그리고 여섯째,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모든 비구들에게
수행의 한 법을 염불이라고 설했다. 즉,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
르시기를 마땅히 한 법을 수행하고, 마땅히 한 법을 널리 펴라, 큰 과
보를 이루며, 모든 선이 널리 이르게 되고, 감로의 맛을 얻어 무위
처에 이르며, 문득 신통을 이루어,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제거하
여 아라한과를 얻어, 열반에 이른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고 하
는가? 이른바 염불이다."고 하셨다.

이는 염불하는 공덕에 의해서 무위처에 이르고 신통을 얻어
열반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한 것은 불교의 수행 중에서도 염불이 중요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관무량수경>>에서는 "부처
님께서 위제희 부인에게 16관을 .........."이라고 전한다.

한편, 정토종의 염불 수행인 나무아니타불 칭명염불에 대해서 설명
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정토종은, 서방 극락정토가 분명하게 존
제하고 염불의 목적이 왕생 극락정토에 있음을 주장한다.

아미타불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대승경전 전체의 1/4 정도에 해
당하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다. 정토사상의 발생과 <<정
토삼부경>>의 성립 연대는 불입멸 후 대승불교가 발생할 무렵
어느 대승인 학장에 의해 이루어졌으리라.

그러나 신앙의 근원은 석가모니불 제세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정토신앙은 인도의용수(불멸 후 6~7백년 경), 세친 보살에 의해
서 그 골격을 잡았고, 중국으로 전래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의 진나라 때 혜원(육경에 통달, 노장에도 밝았다), 불타발타라
후위의 담란, 수의 지자 대사, 당의 선도 화상, 도작 스님에 의해
서 염불 수행은 크게 진작되었다.

특히 도작 스님은 하루에 칠만 번씩 염불하였다. 규봉 종밀 스님은
염불법을 칭명염불, 관상(觀想)염불, 관상(觀像)염불, 실상염불로
구분하였다.

염불 수행이 선종과 결합하여 염불선이 대두되었는데 염
불선의 효시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종에서 수용하는 정토
는 내생이 아닌 지금 현세에서 도달한다는 것이고, 타력에 의한 성취
가 아니라 자력에 의한 자각이란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정토란 곧 자기 마음의 청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심 정토
의 사상은, 정토의 개념을 선에서 수용하여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표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선종에서 정토를 일심에서 통함,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언급한
것은 사조 도신스님의 <<밉도안심요방편법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말 나옹 혜근 선사(태고 보우와 더불어 고려말의
선품을 진작한 대선사)의 염불선을 음미해 본다.

아미타불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붙들고서 간절히 잊지 않는다면
염불하는 일념은 일념마저 끊어진 무념처에 도달하여
육근문에 항상 자마금색 광명을 놓으리.

나옹 스님은 자성미타인 유심 정토를 설하고 있다.
또한 참구염불선이 있는데 이는 염불을 참구한다. 즉 지금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당대에는 서방 정토를 유심 정토로
해석해서 선과 정토가 이념적으로 통합되었고, 송대에는 법안 문익, 영
명 연수 스님이 염불선을 주창했으며, 원대에는 남송시대에 발전
한 간화선의 영향을 받아 염불과 화두 공안이 방법적으로 융합되어 임
제종의 몽산 덕이, 중본 명본 스님 등이 있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120~123